설날 풍경!


반야심경이
세로로 씌여진 여덞쪽 짜리 병풍이 서있고 옷칠이 유난히도 선명한 주사[朱砂]빛 제사상 앞에 한복 차림에 검은색 두루마기를 입은 우리 네 형제와 아들과 조카 여섯이 조상님께 제례를 올리려고 묵묵히 서 있다.

두자반에 넉자 크기의 큰상 하나와 작은상 하나에다 맨 뒷줄에 밥 다섯 공기와 나물 다섯그릇 목잔 다섯개 상어탕이 다섯종지가 놓이고 그앞에 소고기, 산적, 오징어, 찜닭, 조기, 각종 부침, 시루떡, 유과가 중간이고 밤, 대추, 곳감, 삼실과와 풍성한 과일들이 맨 앞줄에 그득하니 놓여있다.

맨 뒷줄 좌 우측에 고색 창연한 촛대에는 방금 불붙인 댓초는 붉은빛을 품어내며 엄숙함을 더하고 있다. 퇴주잔이 놓인 전면 작은상에는 천리향이 타 들어가면서 그윽한 향 냄새를 풍기고 나는 조상님을 떠올리며 제관의로서 제례를 시작했다. 삼년전 삼촌이 돌아 가신후 나는 어느듯 집안의 수장 자리를 물려 받았다.

천천히
좌우를 둘러보다가 무언의 눈짓을 보내고는 작은상 앞에 꿇어 앉았다. 우측에는 바로 밑의 동생 상익이가 다가서고 좌측에는 올해 서른 네 살난 사촌 동생 상균이가 섰고 막내 서른 두 살난 상원이는 뒤쪽 한켠으로 비켜서서 제례를 지켜보며 다음 차레를 기다리고 있고 맨뒤에는 아들 봉희와 조카 건희가 저희들 끼리 눈짓을 보내며 어른들의 하는양을 눈여겨 보고 있다.

제일 먼저
강신[降神] 하시라며 술을 잔에 따라서 향불에 샤른후 퇴주잔에 붓고는 나 혼자만 절을 올린다. 그리고 두 번째 초헌[初獻]에는 다섯 개 잔에 하나하나 다 따라서 향에 사르고는 제주인 나를 따라서 일제히 절을 한다.

방문밖 대청에서 어머니는 먼발치로 우리들 하는양을 지켜 보신다. 매양 우리가 하는 일이 믿업지 못하시는 모양이다. 그 뒤편에는 아내와 셋 제수씨가 가는 목소리로 도란도란 무엇인가 속삭이고 있다. 차차로 엄숙은 무르익어간다.

그 다음 동생 상익이가 아헌[亞獻]잔을 올리고 다들 절을 하고 상균이가 종헌[終獻]잔을 올리고 나면 맨 나중에 상원이가 마지막 첨작[添酌]을 올리고는 절할 때 길게 읍[揖]하면서 조상님께 오래도록 묵도를 드린다. 한동안 시간이 흐른후 아들과 조카녀석의 발가락 꼼지락 거리는 소리가 들릴때면 나는 가벼운 기침소리로 읍의 끝을 알린다.

그런후에
물 그릇 다섯 개가 들어오고 나물그릇은 한쪽으로 밀치고 그 자리에 물그릇을 먼저 뜬 순서대로 놓고 제일 웃 조상 밥그릇의 밥을 떠서 물에 말아 숟가락을 밥그릇에 기대 놓는다. 그리고는 문을 닫고 모두들 돌아서서 고개를 숙이고 묵도한 연후 돌아서서 방문을 열고 절을 한다.

그리고 수저를 내린다음 새로 떠온 나물그릇에 쪼끼칼로 음식을 조금씩 떼어서는 새로 잔을 한잔 따라서 작은상에다 얹은다음 대문앞에 가지고 가서 신문지 한 장 깔고는 음식을 쏟고 그위에 술을 붓는다. 문간 음식은 조상을 따라오신 손님을 대접 하려고 드리는 것이다. 사촌 동생네 집에서 먼저 윗조상을 모시고 우리집에 오니 이것이 끝이다.

사촌 상균이가 밥을 네그릇 떠놓으니 내가 지내는 기제사는 우리집 다섯 번 일년에 합계 아홉 번을 지내는 셈이다. 삼촌이 돌아가시기 전에는 일년에 기제사가 열세번 명절 제사까지 합해서 열다섯번을 지냈는데 삼촌이 돌아가신후에 어머님이 다섯기를 없애고 나에게 물려 주셨다.

우리는 서둘러서 음식을 부엌에 치우고 자리를 만든후에 어머님에게 세배를 드렸다. 아내와 내가 절을 한다음 동생들과 제수씨들이 순서대로 절을 하고 아이들도 할머니에게 절을 했다. 어머님은 올해 일흔 아홉이시다. 우리 오남매를 낳으시고 숫한 고생을 겪으셨다. 아무래도 내가 늘 마음에 걸리신 듯 장남인 우리집만 지키신다. 짜그락 짜그락 매일같이 싸우는 맏 며느리가 그래도 마음이 편하신 모양이다.

신혼 초부터 함께 살아오면서 여느집이나 마찬가지로 고부간 사이는 견원지간 처럼 지내지만 어머니와 아내는 내 얼굴만 쳐다보고 20년을 견디어 왔다. 이제 자식을 잘 못알아보시고 손주 손녀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시어머니의 힘없이 비틀거리는 모습을 보고 아내는 고운정 보다 미운정이 더 많이 든 모양이다. 어느때 보다 오랫동안 고개를 숙였다가 일어선다. 그리곤 살짝 외면하는걸 보니 어느새 눈물이 감도는 모양이다.

우리는
커다란 제사상을 들고나와 그위에 다시 썰어 나온 음식을 차렸다. 그리고 어머님께 어쩌면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제사 음복술을 한잔 드렸다. 멍하니 바라보시던 어머니는 큰 아들인 내가 주는 잔을 받드니 후르륵 다 마시고는 술잔을 내리셨다. 아내가 조기를 뜯어 뼈를 바르고는 당신 입에다 갖다대니 흐뭇한 미소를 지으시며 받아 잡수신다.

그때 두살짜리 코흘리개 조카 두 녀석들이 곁에 앉아 할머니의 하는양을 바라보다가 한녀석이 술잔을 집어 들드니 한모금 마셔 보고는 인상을 잔뜩 찌뿌리며 입을 오물거리는 모습을 보고 그 순간 와-하하하 하는 웃음이 터져 나온다.

" 여보! 그리고 큰 제수씨! 작은 제수씨! 이리 다가 앉아요! 어서 먹고 성서 숙모님에게 세배 가야지요!"

숙모님은 일급 지체 장애자이다. 그래도 젊었을 적엔 지팡이에 의지해서 제사에 참석을 하셨는데 이젠 멀리 출입하시기가 어렵다.
내가 소리치는 바람에 모두들 우르르 숟가락을 챙겨들고 상머리로 다가 앉는다. 왁짜지껄 소리와 함께 맛있는 음식을 먹는다. 술잔을 돌린다.

소나무 새순 끊은 송구로 보릿고개를 넘기고 맹물에 간장 한숫가락 넣고 보리가루 풀어서 삶을 살아간 처절했던 우리 조상의 후손들이 오늘 제사를 지냈다. 그 눈물겹던 조상 덕분으로 기름진 이밥에 상어탕에다 쇠고기 산적을 간장에 찍어서 배불리 먹는다. 내 아들과 딸은 그저 좋아 낄낄 거린다. 큰 제수씨도 작은 제수씨들도 더불어서 호호 거린다. 그리고 화목으로 새해 복을 만들기 시작한다.
고려말 대학자 익제 이제현 할아버지 칠백년 후손 우리집에 웃음꽃이 가득 차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