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船上思(선상사)
뚜~ 뱃고동이 울렸다. 배는 섬을 뒤로하고 하얀 물거품을 일으키며 미끄러지듯 나아간다. 오월의 바람은 훈훈하련만 맞바람 치는 선상이라 그런지 약간 차고 쌀쌀하다. 겉옷을 꺼내 입었다. 건너편 선착장에서 오래도록 손을 흔드는 섬 사내의 늙수그레한 모습에서, 도회지의 바쁜 일상사와는 색 다른 맛이 느껴진다.
섬은 이국적이었다. 여남 중학교를 지나며 본 몇 그루의 해송이 우리를 반긴다. 원 둥지가 수직으로 뻗어 올라 어른 키 두길 쯤에서 줄기가 용틀임 하듯 뻗어 있는 모습이 이채롭다. 잎이 굵고 검푸르게 보였는데 척박한 땅에 살아남기 위해 수분을 축적해 놓은 탓이리라.
산행 길을 따라 서있는 나무는 동백과, 잎이 넓적넓적한 활엽수들이 대부분이다. 일전에 한려수도를 갔을 때 본 풍경과 비슷하다. 금오도는 아직도 외지인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이 많아 세상과 격리된 태고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었다.
옥녀봉에서 내려다 본 다도해는 한 폭의 선경이다. 파란 화선지에 점점이 이어진 듯 끊어진 듯 비단을 펼쳐 놓은 것 같고, 옹긋쫑긋 서있다 비스듬히 휘감아 나가며 구비 친 모습은 마치 아름다운 선녀의 치맛자락 같다.
시인 정지용이 향수에서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 이야기 지줄 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로 시작된 고향 풍경의 묘사 역시 이와 비슷한 감정의 발로이리라. 그가 살아서 이곳에 올라 시를 읊조리면 첫 구절을 어떻게 시작할까?
또 남해 어디쯤인가에는, 일본 주자학의 시대를 처음으로 연 후지와라 세이카의 스승 강항 선생이 왜적에게 포로가 되어 일본으로 끌려간 길목이 있을 것이다. 선생이 영광에서 패전한 이후 가족을 배에 싣고 충무공의 휘하로 가다 짙은 안개 탓으로 적의 포로가 되었을 때의 심정을 이렇게 술회하였다.
"어린 놈 용이와 첩의 딸 애생의 죽음은 너무도 애달프다. 모래사장에 밀려 물결 따라 까막까막 하다가 그대로 바다 깊숙이 떠내려가 버리고 말았다. 엄마야~ 엄마야~ 부르던 소리 아직도 귓결에 들려온다. 그 소리마저 시들어질 때 산 아비가 살았다 할 수 있겠는가?"라는 사연을 간양록(看羊錄)에 적어 놓고 있다. 그가 일본에서 돌아오자 선조는 다시 벼슬을 내렸으나 한사코 거절하며 "나는 죄인이다. 살아도 산몸이 아니다. 생사윤회가 있다면 다시 좋은 세상에 태어나고 싶으니 어서 죽어지기를 바랄 뿐이다." 라고 했다.
선생의 애자(愛子)가 변을 당한 곳이 어디인지 알 수 없지만 바다는 그때나 지금이나 매 한가지요, 물색은 늘 푸르고 변함없으니 그 생전에도 전라 좌수영이요, 지금도 전라도 여수이다. 다만 선생은 피를 토하며 왜를 저주할 때 우리는 한가로이 바다를 감상하니 죄스러운 마음이 절로 든다.
고개를 넘어 목을 지나칠 적마다 살랑거리며 불어오는 바람소리와, 계곡에 가득 찬 싱그런 녹음 속에 나는 혼연히 잠들고 싶다. 저 앞에서 훌쩍 날아오르는 이름 모를 새여. 너는 산에서 살며 숲을 위해 노래를 부르는구나. 네가 지저귀는 소리에 미물은 잠을 깨고 나무는 즐겁게 들으며 자란다. 또 멀리서 불어오는 해풍에 묻힌 안개는 바위를 스쳐가며 마른 이끼에 생명의 젖을 먹이고 간다. 이끼는 마치, 입을 '딱딱'벌린 새끼제비들이 어미가 물어온 먹이를 먹고 기운을 차리듯이, 어느새 보란 듯이 파란 얼굴을 내 보인다. 나무와 풀은 너를 위해 열매를 맺고 너는 그들을 위해 아름답고 신비로운 노래를 부르니, 너희야말로 상생의 진리를 깨우친 성인들이다. 혹 선생의 넋이 너로 변해 내 앞에서 무언의 진리를 가르치고 있는 것은 아니냐?
마지막 능선을 넘는다. 눈 아래 대나무 숲에 묻힌 민가가 보인다. 가까이 다가서니 모두 허물어져 가는 빈집이다. 돌로 쌓은 담을 넘어 집안을 들여다본다. 마당에는 잡초만 무성하고 벽오동 나무 한 그루가 주인 없는 집을 지킨다. 돌담 아래 작은 웅덩이에는 거머스런 물이 고였는데 그 안에 개구리 알이 반달처럼 웅크리고 있을 따름이네.
"아이가 딸려도 시집만 와 준다면야."
농담 삼아 섬 처녀에게 장가가기를 화제로 끄집어냈을 때 원주민 토박이가 한 말이다. 그는 섬에서 두 사람뿐인 택시 운전자였다. 인구 이천 남짓한데, 노총각은 수두룩하고 눈동자 똑바로 박힌 젊은이는 너나없이 봇짐을 싸서 뭍으로 갔단다.
그럼 남은 사람은 모조리 바보란 말인가? 이 곳 최후의 파수꾼은 이민을 왔다갔다 하는, 속된 말로 잘 나가는 인생이 아니다. 그저 허리 굽혀 땅을 갈거나, 구멍 난 그물을 손질하며, 조상의 위패를 끌어안고 허위허위 살아가는 엉머구리 같은 백성들이다. 그들로부터 겨레의 역사는 새롭게 생성되고 뚝배기의 진국처럼 우러나는 인정이 배어나올 것이다.
뚜~ 다시금 뱃고동 소리가 길게 울려 퍼진다. 이 땅의 영혼들과 오래도록 사념(思念)의 대화를 나눈 다음 작별인사를 올리고 일어서니 다리가 후들후들 하다. 선창에는 어지러이 술병이 널려있고 무침 회 접시 하나가 발 앞에 달랑 놓여있다. 바람은 더욱 세차게 귓전을 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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