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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왕산 연가(戀歌)
오늘도 산을 오른다. 산은 나의 오랜 친구이자, 어머니이다. 산 꾼이라면 산에 얽힌 유별난 추억이 많이 있겠지만, 나와는 주왕산이 가장 인연 깊은 곳이 아닌가 한다. 이십대 초반의 일이었다. 그 무렵 나는 군 징집 영장을 받아놓고 쉴 참으로 주왕산으로 갔다.
누런 먼지를 날리며 달리던 시골길 버스 안에는, 촌 아낙들이 보따리 위에 앉아 스스럼없이 떠드는 모습이 무척 고향스럽고, 덜커덩거리는 율동에 몸을 맡긴 채 기타를 치며 열창하는 재미도 쏠쏠하였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창밖으로 휙휙 넘어가는 장면을 눈요기하는 것이야말로 여행의 으뜸가는 낭만으로 손꼽지 않을 수 없다.
절 앞에서 입산을 막는 바람에 우리는 주차장에서 텐트를 치고 야영을 하다, 밤이 이슥해지자 배낭을 꾸려 산속으로 숨어들었다. 마침 보름이라 달이 환한데 폭포는 허연 물보라를 일으키며 쉼 없이 떨어지고, 요요(妖妖)롭기 까지 한 산은 밤의 은밀한 자태를 드러내고 있었다. 우리는 흥에 겨워 밤 새워 술 마시고 웃고 떠들다, 그도 시시해지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물속으로 첨벙 뛰어들어 물장구를 치거나, 손바닥으로 물을 갈라 앞으로 쏘는 싸움을 하며 키득거렸다.
며칠이 지나자 같이 온 친구들은 다들 집으로 가고 나 혼자 덜렁 남았을 때, 보따리를 싸들고 내원 분교로 가서 지내다 군 입대 며칠 남기고 마지못해 돌아온 일이 있었다. 집보다 산이 더 좋았으니 무려 한 달을 산속에서 살다 왔다. 산 번지를 취득한 지 얼마 후에는 시계를 잡혀 식량과 부식을 마련하고, 그마저 밑천이 바닥나자 나중에는 밭에서 일해 번 수입으로 버텨나갔다. 산 속의 생활은 하루하루가 즐거움의 연속이었다.
내일이면 가야지라고 마음을 먹다가도, 비오는 날 산머리 전부가 작은 폭포를 이뤄 올올이 떨어지는 물줄기를 바라보는 멋이라던가, 캄캄한 밤 텐트 안에 켜 논 램프의 불빛을 홀로 바라보노라면, 외로운 심사는 풍경에 도취되어 무아 속으로 빠져들기 일쑤였다.
당시 내원마을에는 부부교사가 이발사, 의사, 간호사 역할까지 맡아가며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아이들은 교실 바닥에서 제멋대로 그림을 그리거나 딩굴었는데, 그 천진난만한 녀석들이며, 자연과 하나 되어 꾸밈없이 살아가는 그들 부부의 모습에 매료된 것도 오래도록 눌러앉아 있었던 이유 중의 하나였다. 지금쯤 그 아이들과 선생님은 어디로 갔을까?
또, 멀리서 발을 싹싹 비비며 눈을 반짝이던 등 검은 털을 가진 다람쥐며, 적의 습격을 받아 위기에 처해 있었던지 애처롭게 울어대던 이름 모를 새의 울음소리가, 세월의 저쪽으로 밀려나 뇌리 속에 잠들고 있다. 맑디맑은 냇물에는 송사리떼 이리저리 쏘다녔고, 달이 뜬 초옥에는 촌로들의 옛 얘기 도란거림이 밤늦도록 흘러 나왔지. 하늘엔 별이 총총한데 견우직녀가 상봉한 그 다리 어디론가 사라지고, 스산한 밤바람이 불어오면 사위는 꿈속에 잠기고, 억새 흔들리는 소리만이 이튿날 새벽까지 이어 지곤 했었더래.
그 추억의 두지에 가라앉은 산을 되새김질할 때마다 불현듯이 가보고 싶은 곳이나,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버린 그들이기에 만날 수 없음을 안타까워하며 오늘도 나 홀로 속절없는 울음을 삼킬 따름이다. 그러나 나는 회상(回想)할 자유를 지니고 있기에 상상의 나래를 펴고 한 마리 학이 되어 창공을 나르는구나.
아 - 주왕산아! 너는 내 젊은 시절을 송두리 채 불태우고도 모자라 이토록 그리움에 떨게 만드느뇨? 언젠가는 내 다시 가리라. 가도 이번에는 눈 나리는 어느 날, 아무도 몰래 내원 마을 훨씬 넘어 인적 없는 골짜기에 나 홀로 텐트를 치고 램프를 켜 두리라. 그러면 옛적 날 빤히 쳐다보던 그 다람쥐 텐트로 다가와, 내 체취를 맡아 보고 편한 잠을 자고 가리라는 기대로, 다시금 온 몸을 떤다. 또 가랑비 주룩주룩 오던 그날 밤, 슬피 울던 산새가 날아오면 내 품에 보듬어 안고 언 몸을 녹여주련다. 그리고 산에서 주운 밤을 코헬에 넣고 불 소리 파르르 떠는 시나브로 버너로 삶아, 노란 속을 꺼내 네게 주고 따뜻한 물 한 모금 먹이는 것도 결코 잊지 않으리라.
산아, 너는 변함없는 벗이자 무언으로 자신을 일깨우는 영원한 스승이기에 오늘도 나는 가까운 산을 오른다. 누군가가 산을 오른다는 것도 거슬리는 표현이니 ‘산에 든다.’ 라고 해야 옳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이 얼마나 겸손하고 자연스러운가? 산에는 살아있는 학문이 있고 바라보고만 있어도 마음 열리는 지혜의 샘이 있다.
에베레스트를 처음으로 오른, 힐러리와 텐징이 기자 회견을 가졌을 때 "누가 먼저 올랐느냐? 왜 목숨을 걸고 그런 곳에 갔다 왔느냐?"라는 질문에 힐러리는 "당신네들처럼 쓸데없는 질문을 하는 사람이 없는 곳을 우리는 갔다 왔을 뿐이다." 라고 대답한 그 말에 담긴 뜻이 깊은 감동으로 다가온다. 불과 몇 달 간 그 둘은 한 곳에 살았지만, 찰나 간에도 수 없는 사지를 넘나들며 쌓인 고귀한 영혼으로 교감의 세계를 열었기 때문에 그와같은 해답이 나왔으리라. 나 역시 너를 잊지 못해 오늘도 창고속의 배낭을 꺼내 들고 만지작거리는 순간, 마음은 벌써 네게로 가서 너와 하나 되어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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