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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갈대의 꿈 -
바람이 불어온다. 멀리 구릉에서 올라온 회오리바람은 산허리를 지나며 한바탕 요동을 치고, 내 곁을 스치더니 능선 위로 사라진다. 때맞춰 갈대가 휘청거리며 부르르 떠는 비명에, 작은 떡갈나무도 덩달아 신음소리를 내놓는다. 산머리에서 바람을 맞받은 바위는 나무의 아픔을 아는지 모르는지, 입을 다문 채 묵묵히 아래를 굽어다 보고 있다.
갈대의 물결이 출렁대는 산야는 수십만 대군이 기치창검을 늘여 세운 채, 동해로부터 상륙하는 왜적을 맞아 전장에 나서는 병사들 같이 숙연해 보인다. 가던 길을 멈추고, 서 있는 그들의 마음을 읽어 보려고 애를 써 보지만 알아낼 도리가 없다. 머잖아 겨울이 닥치리라. 그리고 정해진 운명의 굴레 속으로 갈대 역시 돌아갈 것이다. 나도 그렇게 초연할 수 있을까?
때맞춰 어디선가 애수에 찬 노래가 들린다. 귀에 익은 곡이다. 그러잖아도 타는 듯한 노을로 미묘한 마음이 흔들리는 차인데, 지나간 옛 상흔을 다시 끄집어내는 듯이 노랫가락은 애상(哀想)스럽기 짝이 없다.
"갈대밭이 보이는 언덕 통나무 - 집에, 길 떠난 소녀같이 하얗게 밤을 새우네. 마주하고 앉은 그 사람 목소리가, 아 - 아 - 길 잃은 사슴처럼 그리움이 돌아오면 쓸쓸한 갈대 속에 숨어 우는 바람소리."
소리의 주인공을 찾아 눈을 돌리니 산 중턱 외진 곳에 자리한 일단의 팀이다. 희끗희끗한 머리카락을 휘날리는 노년의 부부들이 다정스레 부여안고, 돌아가며 노래를 부르는데 가을 풍경과 어울려 아름답기 그지없다. 죽음이 가까이 오면 강을 거슬러 모천에 산란하려고 모여 드는 연어 떼같이, 그들 역시 동화 속의 주인공처럼 아릿한 봄밤의 꿈을 찾아 헤매고 있구나. 인간이면 누구나 모태로 돌아가고 싶은 회귀 본능의 원초적인 모습이리라. 그 꿈을 쫓는 장면을 보니 예전에 들은 고사가 문득 떠오른다.
"내가 말일 세 엊저녁에 꿈을 꾸었는데 꿈속에 모진 고생을 하며 살자니 너무 괴로워서 강물에 몸을 날렸지. 그러다 나도 모르게 '악!'하고 놀라 일어나 보니 꿈이었지 뭔가. 아무튼, 이렇게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참으로 행복하네. 아니 그런가?"
"맞네. 자네 말이 맞아.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은 법일세. 두고두고 오래 살고 볼일일세." 그러자 지켜본 노승이 운을 뗀다.
"허허허. 시주가 꾼 꿈도 꿈이요. 지금 시주들이 살아있음을 안도하는 이것 역시 꿈이지요. 본래 꿈이 아닌 것이 없는 법입니다."
그렇다. 나 역시 지금 꿈을 꾸고 있구나. 산 속에서 꿈을 찾아 헤매는 아름다운 장면마저 무한한 공(空)의 세계에선 무의미한 것이리라. 그들은 곧 이곳을 떠날 것이고 서리 맞은 갈대마저 꺾여, 얼마 후엔 흙으로 돌아가 새 생명을 잉태시키겠지.
가막볼 협곡에서 명의 유의태의 주검을 해부한 허준의 행적이 아득한 옛일이고, 일본으로 건너간 사명당과 표충사 사신도에 그려진 인물들이 가뭇없이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진 모습을 지켜본, 사자평의 나무와 풀들이다. 다들 제 갈 길로 간 것이다. 수없이 늘어선 갈대가 속삭이는 언어의 몸짓이나, 여기까지 갈대를 보려고 오른 나의 모습이나 모두가 꿈이리라.
살아오며 여러 번 자신을 되돌아볼 기회를 가졌어도 이만큼 가슴에 다가서기는 전에 없던 일이다. 나는 늘 그랬듯이, 생각하는 갈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개미 쳇바퀴 돌듯이 나의 삶은 제 자리 걸음을 일관하였다. 이제껏 무엇 하나 제대로 이룩한 것 하나 없으니, 숙연히 가을을 맞는 저 갈대보다 나은 게 무엇인가? 언제나 헛된 꿈을 찾아 헤매다 화들짝 놀라 돌아왔을 때는, 차디찬 강물 위에 뜬 닻 없는 배처럼 현실에서 저만큼 밀려가 있었고, 발을 동동 굴렀지만 이미 때늦은 나날뿐이었다. 저 갈대는 절기에 맞춰 움을 틔워 푸르러지고 갈 때를 알아 낙엽 지는 순리를 따르건만, 나는 네가 허리를 굽히는 모습을 보고 이치를 깨달으니 너보다 못한 한낱 미물에 불과하구나.
아 - 지금도 나는 긴 미로 속에서 그 무엇을 찾아 헤매고 있는 것은 아닌가? 손가락으로 볼을 꼬집어본다. 분명히 꿈은 아니고 꿈을 지켜보는 또 하나의 꿈속에 내가 있음을 알겠네. 그렇다면 새로운 미래를 위해 길을 떠나야지. 아직도 내겐 남은 시간이 있으니, 이번에야말로 진아(眞我)를 찾는 여행을 다시 시작 하리라.
"까악, 까악 -"
해는 저만치 떨어지는데 배고픈 까마귀 멀리서 울어댄다. 회억(回憶)의 상념에서 깨어났을 때, 그들 부부는 저녁노을에 반짝이는 은백색의 머리칼을 날리며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려고, 보이는 만상(萬象)에 길고도 애절한 톤으로 마지막 피치를 올린다.
"아 - 아 - 길 잃은 사슴처럼 - "
하늘을 날던 까마귀 한 쌍이 어느새 건너편 바위에 앉아, 노부부가 연출하는 석양의 무대를 조용히 바라보고 있다. 또 바람이 불어온다.
- 사자평을 다녀와서 -
바람부는날이면
cafe.daum.net/ddanjid
대구대평산악회
cafe.daum.net/daepyung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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