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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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기    ( 2007/09/13 14:23:01, 조회수:1692 )
이름  

이상승 (sang121234)

제목  

노인봉을 넘으며

노인봉을 넘으며



오대산 갔을 적에 일이다. 가을은 무르익어 가고 하늘은 드높아 말 그대로 천고마비의 계절이었다. 당시 청룡 산악회가 기치를 올린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이끄는 주역이 처녀 총각이라 그런지 주말이면 선남선녀가 산악회 사무실로 모여들었다. 그때 나는 군 복무를 마친 후 몇 해 지난 무렵이었고 희수문제로 마음의 갈등을 겪던 터라 전국의 명승고적지를 쏘다니며 그 해법을 찾던 중이었다.

우리가 자리 잡은 곳은 월정사 바로 밑 어느 야산 근처였다. 나는 일행과 멀찍이 떨어진 곳에 삼각형 텐트를 친 후 석유램프에 불을 밝혔다. 어둠 속에 잠긴 사위가 서서히 밝아 오며 한동안 잠잠하던 풀벌레 소리 다시 요란해지자 어지러운 심사에 외부 자크를 내린 후 훌렁 드러누웠다. 밖에서 떠드는 소리 왁자했지만 나가지 않았다.

나는 스스로 고독을 즐기는 편이라 고독 속에 함몰하고자 산수 간을 찾아다니며 책을 읽었고 감상에 젖어 자주 눈물 흘리는 나약한 면이 있었다. 또 글 속 주인공 처럼 광활한 천지를 무대로 한 자루 검과 무용으로 약자를 도우는 호쾌한 협객이 되었다가, 가녀린 바람 소리에도 떠는 이름 없는 산야의 한 떨기 청초한 꽃잎으로, 때로는 호접몽 속의 장자 같이 꿈속 나비가 되어 이승과 저승을 넘나들며 절대 세계는 어떤 것인가라는 주제로 자주 밤을 새웠다. 그러다 꿈을 깨 현실로 돌아오면 그녀가 펼쳐놓은 사랑의 덫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고뇌하는 연약한 유생으로 돌아오곤 했다.

누군가가 고독하면 여행을 떠나라고 했던가. 틀린 말은 아니지만 나는 여럿 속에 섞여 있으면서도 홀로였고 어울려 신나는 노래를 하면서도 여전히 외톨이였다. 홀로 있는 동안은 늘 사색하는 시간이었다. 무심히 흘러가는 개울물 소리, 창공에 떠 있는 한 점 구름이 움직이는 모습, 들풀 넝쿨 사이로 부드럽게 지나다니는 실바람,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가 내려앉으며 무어라고 지저귀는 종달새 소리에도 귀를 기울였다. 또 야심한 시각 높고 낮은 음으로 “찌르르 또르르 까르르” 울어대는 하찮은 벌레들의 합창을 듣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내가 벌레인지 벌레가 나인지 구별하지 못하는 희한한 일을 자주 경험하였다.

이런 것들은 희수가 떠나고 난 이후 "나와 희수의 관계는 무엇인가?"라는 명제로 사색하는 버릇에서 생겨난 산물이었다. 아마 나는 전생에 꽤 괜찮은 선비였던가 보다. 가끔 마른 대낮 번개 치듯이 어떤 생각이 떠오르는데 줄거리가 대략 이러하다. 과거 길에 오른다. 어느 집을 지나치다가 우연히 그녀를 만나 정분을 맺는다. 홀연히 떠난다. 그 후 언약을 지키지 않는다. 나를 사모하는 그녀의 마음이 간절한 염원으로 작용하여 이승에 넘어온다. 마침내 그 대가로 오늘날 내가 괴롭힘을 당한다는 생각이 지금도 문득문득 뇌리 속을 스친다. 아무튼, 월정사의 그 밤은 옥수수를 삶아 먹으며 일행들과 재미있는 노래도 부르고 매화놀이와 익살스런 재치문답으로 그 밤을 보냈다.

그런 추억을 되새김질하며 평평한 오대산 능선 길을 걸어 노인봉을 넘고 식사를 한 후 멀리 바라보니 앞에 놓인 하산 길은 장난 아니게 길다. 과연 명산이란 이름에 걸맞게 운무에 싸인 광활한 지역, 험준한 산세 속에 쭉쭉 뻗은 침엽수, 억겁을 두고 무수한 생과 사의 과정을 거치며 어우러진 갈잎의 장관, 이름을 알 수 없는 장대한 바위의 입상 앞에 우뚝 선 금강송, 헤아릴 수 없는 역사의 현장을 만들어 낸 사찰과 신화 속 주인공의 모습을 묵묵히 지켜본 오대산이다.

육이오 사변 때였다. 당시 공비의 근거지를 없애려고 국군이 상원사를 불태우려 하자 끝까지 절을 지키던 한암스님이 가사와 장삼을 갈아입고 정좌한 뒤 “당신이 장군의 부하라면 나는 부처님의 제자요. 당신이 명령을 수행하듯이 나도 부처님의 불법을 지켜야 하니 어쩔 수 없소. 자 이제 불을 지르시오.”라고 하자 그 처절한 불심을 바라본 국군 장교가 문짝만 떼 불 지르고 물러서는 바람에 절을 지켜냈다는 일화가 있다. 그 후 뼈만 남은 앙상한 몸으로 대웅전에서 가부좌를 한 채 입적한 스님의 법체를 보았다고 하니 해탈의 증표로 그보다 더 확실한 게 없으리라. 산이 지켜본 사연이 어찌 그뿐일까. 보릿고개에 접어들면 헐벗고 굶주린 백성이 산에 올라 나물을 뜯고 솔가지를 꺾어 연명했을 터이니 산은 우리를 보살피는 인자한 어머니라 아니할 수 없겠다.

가도 가도 나무다리 이어져 있고 계곡마다 맑고 푸른 물이 힘차게 감아 돈다. 파란 소에 떨어지는 폭포수가 잠룡이 승천하며 내는 우렛소리 같고, 숲에 사는 새들은 “재자글 재자글”하니 강약이 어울려 신묘한 천음으로 나그네의 피로를 씻어 준다.

하산 길에 금강사 대웅전에 들러 딱 한 장밖에 없는 천 원짜리를 꺼내 시주함에 넣은 후 번뇌를 없애 달라는 절을 시작하니, 어느 여인 얼핏 드려다 보고 말없이 절 모퉁이를 돌아갔다. 나는 그녀와의 인연이 예사로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전부터 잘 안다. 하고많은 사람 중에 만나는 것도 삼생의 인연이 있어야 한다는데 우리는 수백 차례 만남과 헤어짐을 통해 거짓 없는 참된 모습을 보았고 알 수 없는 나머지 부분들은 유추로 얼추 짐작 가능하기 때문이다. 오! 마음이 천사 같은 그대. 신의 축복이 있으리라.

나는 지금 더없이 행복하다. 주위는 나를 돌봐 주는 이들로 가득하고, 내가 초청하면 기꺼이 달려와 자리를 메워주는 친구가 있어 반갑고 고맙기 짝이 없다. 어느 벗은 평소에도 자상한 형처럼, 때로는 열병으로 고열에 시달려 보채는 아이를 달래는 어머니같이, 아무 때나 느닷없이 전화를 해 술 사달라고 어거지를 부려도 헐렁한 웃음으로 "오냐. 오냐. 언제 올래?"라고 하며, 내가 괴롭고 외로울 때 속 깊은 마음으로 헤아려 주는 벗도 이 자리에 있다.

그뿐인가? 만고에 변할 줄 모르는 수석과 청풍명월이 여기 있으니 더 무엇을 구하랴. 흐르는 저 물같이, 묵묵한 바위같이, 내 안도 저들을 닮아 가리라. 소인배 앞에 고개를 수그리기 싫어 수레를 타고 유유히 고향으로 돌아가 술 익는 냄새를 맡으며 한 세상을 보냈던 고사 속의 도연명 역시 그런 마음이겠지.

가자. 가자. 아래로 가자. 컬컬한 입담 좋은 사람들이 모여 있고 언제 보아도 정답고 허허로운 마음이 가득 찬 벗들이 있는 곳으로 가자. 시절 잘 만나 병아리 눈물만큼 출세한 덕분에 손에 흙 안 묻히고 땀 흘린 적이 없다 보니, 남의 어려움은 헤아릴 줄 모르는 꽁생원 같은 부류가 없는 곳으로 가자. 투박한 손에 때 묻은 망치로 뚝딱뚝딱 일을 하고, 등짐을 져 땀을 흘려 번 돈으로도 기꺼이 술 한 잔 살 줄 아는 사람들이 모인 곳으로 어서 가야겠다. 암 그렇고말고. 마음이 바쁘니 걸음이 빨라진다. 다리는 묵직하나 산을 뒤로 두고 속세로 가는 마음은 가뿐하다.

"쉬이- - - 모든 번뇌는 물렀거라. 물렀거라. 딴지 대감 나가신다."





<2007년 9월 16일 오대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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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cafe186.daum.net/_c21_/home?grpid=tqFJ

이곳은 제가 주인입니다. 저는 대구등산학교 정규반 44기 암벽12기 동계12,13기를 수료하였습니다. 부담 갖지 마시고 많이 놀러 오세요. 딴지는 제 닉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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